편집부 cocoa
1.
스무 살하고도 몇 년이 지났을 무렵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고등학교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의심이 그제야 확신으로 바뀐 것이다. 깔끔하게 인정했다.
내가 특별하거나 비범한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살았을 리 없고, 이 정도 나이라면 해도 뭘 했을 나이었으니까. 내가 알던 위인들이 그랬듯이.
나는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극소수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위인처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으니까,
나이를 먹으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장래희망란에 거침없이 대통령, 과학자, 수학자를 적어내던 어린 시절은 지나간 뒤였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는 그럴듯한 포장 아래 자기 비하를 품었다.
내게 위인은 그런 존재였다. 호랑이를 때려잡거나, 어릴 적부터 천자문을 줄줄 외거나,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게임 속 영웅 유닛과 일반 유닛이 극명하게 나뉘듯 나에게 위인은 근본이 다른 완전무결한 존재로 느껴졌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삐뚤어진 성격 탓에 자꾸 나와 위인을 비교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내가 가진 단점들만 극명하게 보였고, 열등감으로 이어졌다.
내가 가진 흠결들이 싫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내 ‘찌질함’이 싫었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예전만큼 자신을 깎아내리는 데 열 올리지 않는다. 그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으며, 이 외로운 세상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내 생각에 균열을 일으킨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장 자크 루소
루소라는 아저씨와 관련된 책을 읽던 중이었다.
다 알겠지만 간략하게 이 아저씨에 대해 설명하자면,
격동의 18세기에 태어나 <사회 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등의 명저를 남긴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업적만 놓고 본다면 의심할 바 없이 인류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다.
내가 특히 더 관심을 가졌던 책은 <에밀>인데, ‘에밀’이라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써낸 교육 서적이다.
이 책을 통해 루소는 아동중심교육과 아동의 흥미에 근거한 교육을 최초로 주장하며, <에밀>을 교육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혹자는 이러한 이유로 루소가 현대 교육 철학의 뿌리를 제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룬 루소는 무척 방탕한 삶을 살았다.
여러 처자와 놀아남(?)은 물론, 자식도 알게 모르게(?) 많이 낳았다. 내가 그에게 결정적으로 실망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자기 자식을 5명씩이나 고아원에 보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교육자인 그가 자기 자식을 키우는 것을 포기하는 모순적인 상황.
<에밀>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으며,
‘이 사람은 졸라 짱이야’ 생각했던 나에게 루소의 이러한 만행은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의 지성을 시샘한 옹졸한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그 행위만 놓고 본다면 그는 언행 불일치한 사람이자 거짓말쟁이였다.
그러나 그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위대한 통찰을 남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를 ‘위인’으로도 ‘망나니’로도 규정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짝 기자의 <찌질한 위인전>을 봤다.
연재가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김수영 시인 편을 읽고, 루소에게 느꼈던 그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부인이나 때리는 찌질한 사람이 양심과 저항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니.
연재가 계속될수록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바뀌어 나갔다.
루소를 통해 생긴 작은 균열이 <찌질한 위인전>을 통해 점차 넓어진 것이다.
위인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고쳐나가며 많은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대단한 업적을 이뤘다는 사람들도 모순투성이이며 찌질하고 끝없이 고민한다는 모습을 그제서야 봤으니.
내가 가진 찌질함이 나를 부정하는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발 더. 그 찌질함과 모순은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인을 위인이라 불리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김수영이 자신의 밑바닥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이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제서야 루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째서 그가 교육에 그토록 많은 고민을 쏟았으며,
<에밀>이란 명저를 남길 수 있었는지. 그는 자식을 5명씩이나 고아원에 보냈다는 자신의 찌질함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 봄으로써 <에밀>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어쩌다 보니 하라는 책 소개는 안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런 건 재미도 없고 책 판매에도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풀어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요런 리뷰를 쓸 수 있었던 건 <찌질한 위인전>이 가진 컨텐츠의 힘을 믿고 있으며,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주제와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과 같은 바보 같은 고민을 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칭찬 일색에 미화로 가득 찬 위인전이 내게 편견을 심어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 책들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우열을 가르려는 것은 아니다. 발달 단계상 어린아이들은 그런 책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다만 그간 우상 만들기와 흑백논리로 점칠 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책이 너무나 부족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위인을 미화하는 책, 공과 사를 기계처럼 나누는 책이 아니라 위인의 삶 전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책, <찌질한 위인전>과 같은 책이 값진 이유다.
특히 이 책을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식은커녕
더 많은 열등감만 쌓아가는 교육시스템 하에서 가장 불운한 시절을 보내며 고통받고 있을 중-고등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끝으로 목차만 대-충 보고 여기 나오는 위인들이 찌질하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반인륜적 행태를 부리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독서는 인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