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낍(feat. 죽지않는 돌고래, 락기)
한국에 이탈리아 지명을 딴 레스토랑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니 제법 오래 전 이야기다(글타고 나 조선시대 후기에 태어나고 그런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큰 마음 먹고 고급 레스토랑에 도전했더랬다. 이게 웬걸, 딸기쨈이나 마가린 대신 빵을 찍어먹는 묘한 소스를 주는 것 아닌가.
기름에 둥둥 떠있는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 직원의 실수라 확신했지만 상대는 고급 레스토랑이라 클레임 걸 용기는 없었다. 먹고 나서 퉤퉤퉤,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클레임을 걸자!, 라는 다짐으로 반신반의하며 찍어먹었더랬다.
아아, 새로운 지평이 열렸던 그 액체.
그때 알았다. 고것의 정체가 올리브 오일과 함께 나온 발사믹 식초라는 것을.
우리가 먹던 발사믹은 대부분 가짜다
취재 차, 프랑스 친구에게 “프랑스인에게 발사믹이란?” 질문을 던져보았다. 의외로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하다 나온 대답들은 모두, '너무 당연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마치 한국인에게 “당신에게 국간장이란?”을 묻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질문에 답은 못하였지만, 프랑스 친구들의 발사믹에 대한 조언은 언제나 하나다.
“마트에서 파는 발사믹은 진짜 발사믹이 아니야...”
“진짜 발사믹을 먹어야 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발사믹 식초 중 상당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흔히 마트에서 만나는 발사믹 식초는 와인식초와 각종 혼합물을 베이스로 한 유사 발사믹이다. 톡쏘는 식감, 상큼한 포도향이 발사믹 식초의 매력이라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유사 발사믹을 먹고 있었다는 증거다. 오리지널 발사믹은 향긋함과 달큰함, 그리고 부드러운 목넘김이 있는 깊은 맛이 난다.
에헴. 몰랐지?
... ...
사실 나도 몰랐다. 뭐 이렇게 공부하고 취재하면서 아는 거지 뭐.
프랑스에서 발사믹의 위치
프랑스에서 Le Vinaigre Balsamique(르 비내그르 발사미크)라고 불리는 발사믹 식초는 15세기 모데나 레조 공국(현 이탈리아 북부)이 원조이며, 현재도 가장 유명한 발사믹 포도산지는 이탈리아의 모데나 지역이다.
청포도를 고르고 골라 발효통에 넣어 숙성시킨다. 숙성이 시작되면 자연스레 그 양이 줄어드는데, 매년 다른 소재의 발효통으로 옮겨 담는다. 양이 주는 만큼 더 작은 통으로 옮기기에 완성된 발사믹 식초의 양은 처음보다 현저히 적다.
이거, 당연히 금방 안 된다. 몇 개월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아아, 그 정도면 좋으련만 적게는 8년부터 30년까지 발효시킨다. 미식가들의 말을 빌리면, 최소 12년은 돼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30년산이 되면 점도도 증가해 맛과 향이 깊어져 시럽 같아진다 한다.
오래 발효한 발사믹 식초는 다른 식재료 없이 한 스푼 떠먹어도 맛이 좋다. 부드럽게 퍼지는 향과 달콤한 맛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게다. 발사믹 식초라 불리지만 하나의 소스로 대우받는 이유다.
프랑스에서 발사믹은 일상요리부터 고급요리까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하다못해 샐러드 하나를 만들어도 발사믹은 빠질 수 없다. 어느 식당이나 발사믹을 요구하면 자기들만이 쓰는 발사믹을 바로 내어줄 수 있을 정도.
으응?
헌데 이탈리아가 원조라면서 왜 프랑스산이 인정 받을까?
흔히, Artisan(아티장)이라 불리는 프랑스 장인 정신 때문이다. 이탈리아산 원재료가 좋은 건 인정. 헌데 불란서가 원하는 맛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인정하는 경지가 나올 때까지 뚜벅뚜벅 만들면 되는 거다!
언제까지?
원하는 맛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해서 나온 발사믹이...
프랑스 발사믹 식초 메종 브레몽 1830
Maison Brémond 1830(메종 브레몽 1830).
숫자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메종 브레몽은 1830년에 설립된 액상프로방스 지방에 위치한 식품회사로 현재까지도 가족기업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탈리아 모데나 지역의 포도를 공수, 발사믹으로 발효시켜 만들어 내는 곳이다. 대량생산이 불가해 대형마트에는 공급되기 어렵고 지역의 맛잘알들이 소비하는 발사믹이다.
... ...
응? 먹지도 못할 거 소개만 하고 입맛만 다시게 할 작정이냐고?
본 마켓요원이 프랑스까지 가서 울메나 고생했는데(잠시 눈물을 닦는다) 공수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런 걸 쓸 이유도 없다.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딴지마켓을 통해 그 맛을 아는 1인이 되어 아티장의 발사믹을 만날 수 있기에 이렇게 전하는 게다.
에헴.
현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유니크함
Rive Gauche Passage 파리의 오래된 부촌의 상점가
본인이 고생한 티를 좀 내자면, 구하기 정말 어렵다. 첫 취재 때다. 프랑스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바로 파리로 날아왔건만 처음부터 낭패였다.
1830을 구경해보려고 파리에서 유명하다는 대형 고급 식료품점을 다녀봤는데, 으아아아아, 없다!! 한 군데도 없다. 이때 안 거다. 대량 생산이 어려워 대형마트나 백화점에는 거의 입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른쪽에 메종 브레몽 1830 간판이 보인다.
결국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며 여기저기를 쏘다닌 결과(유명하면 쉽게 나오겠지, 생각하며 바로 프랑스행을 택한 나의 패착... 시무룩...), 파리 센느강의 Rive Gauche(히브 고슈, 좌안, 매우 부촌)의 오래된 Passage(빠싸쥬, 상점가)에서 지점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빠싸쥬는 젊은 시절 나폴레옹이 값을 치르는 대신 모자를 두고 간 것으로 유명한 유서깊은 레스토랑 외에도 문구용품 등 다양한 아티장의 부티크가 모여있는 오래된 골목길이다(여전히 나폴레옹 모자를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발품을 팔아 겨우 1830 발사믹 식초를 만나게 되니,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가치있는 제품을 알게 되었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 그럼 먹어봐야겠지?
다양한 숙성 연도, 그에 걸맞는 맛.
15년과 30년, 그리고 20년 숙성.
15년 숙성과 30년 숙성. 그리고 20년 숙성 발사믹을 한 스푼씩 입에 넣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맛있다.”
15년 숙성은 상대적으로 환한 빛깔을 가진 와인 같은 색을 가졌으며, 맛은 포도의 향기가 상큼하게 콧속을 두드린다. 입안 전체에 부드럽게 감기면서 향이 점점 증폭된다.
30년 숙성은 보다 진득한 액체의 느낌으로 짙은 루비색(내지는 간장색)을 낸다. 달큰한 맛이 한층 강해졌고, 발사믹 특유의 향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20년 숙성은 15년과 30년의 딱 중간이라고 보긴 어렵고 15년 숙성에서 포도의 단맛이 조금 더 난다고 보면 되겠다.
본인, 식재료에 관심이 많아 나름 다양한 발사믹을 먹어왔다 자부했다. 그 동안 발사믹의 깊은 맛이 좀 부족하게 느껴져 약불에 졸이거나 과일 또는 다른 향신료를 첨가해 점성을 높여 소스로 사용하곤 했다. 허나 15년 숙성, 20년 숙성, 30년 숙성 모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더라. 본인이 보장한다. 풍부한 맛이 한방에 입 안에 퍼진다.
이쯤되면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요리에 쓰면 어떨까?
귀한 발사믹, 요리에 써보았다.
프랑스 코스요리의 Entrée(앙트레, 전식)라고 하면 보통 달팽이요리나 푸아그라를 떠올리게 된다. 요즘엔 BIO(유기농)에 열광하는 파리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심플한 앙트레가 있기에, 겸사겸사 소개하려고 만들어봤다.
La Vinaigrette pour avocats (라 비네그레트 뿌흐 아보꺄)
비네그레트 소스(=프렌치드레싱)를 곁들인 아보카도
말 그대로 식초로 소스를 한 아보카도다. 너무 간단해 뭐 이따위 것을 소개하냐 하시면 죄송할.... 것 같냐!!
진짜 발사믹 식초와 함께 먹어본다면 ‘오호, 너 좀 먹어본 녀석이구나’ 하는 마음이 샘솟게 되실 거다.
만드는 법
신선한 아보카도를 준비한다.
씨를 기준으로 칼집을 내고 살짝 비틀어 반으로 가르고
숟가락으로 껍질에서 과육을 떼어낸다.
올리브오일(라리유낭뜨와 같은 좋은 올리브오일일수록 맛이 좋다)을 살짝 곁들이고 소금, 설탕, 후추를 뿌린다.
발사믹 식초를 과육에 뿌리고 씨앗구멍에 가득 부어준다.
앞서 발사믹 식초에서 충분한 단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었기에 소금과 설탕을 제외하고 만들었다.
15년 숙성과 함께
: 식당에서 먹었던 것처럼 상큼한 맛이 확 퍼진다. 올리브오일을 조금 많이 뿌렸는데, 상쾌한 풀내음과 함께 풍부한 포도향이 어우러지니 밸런스가 맞다. 소금과 설탕을 제외한 게 신의 한수였다. 별도의 단맛과 짠맛보다 발사믹 소스 고유의 맛을 느끼는 게 나았다. 한숟갈만 먹고 다음 것 만들려고 했는데 다 먹고 다음 것을 만들어서 30년산으로 만든 접시를 먹을 때 배가 불렀다.
20년 숙성과 함께
: 한국인 입맛에 알맞은 적절한 밸런스로 느껴진다. 확실히 15년 숙성에 비해 상큼한 맛 보다는 포도의 눅진하고 묵직한 맛이 더 느껴진다. 하지만 30년에 비해선 상큼한 맛이 확실히 존재감을 내뿜는다. 15년과 30년 중간 어디쯤의 맛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20년 숙성 발사믹이 기막힌 선택지가 될 것이다.
30년 숙성과 함께
: 단맛이 한층 더 풍부해진다. 상큼한 맛 보다는 진득하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 15년산과 달리 아보카도의 크리미한 질감이 더 살아난다. 달큰한 느낌이 목넘김에 약간의 생기를 넣어준다. 만들면서 행여라도 와락 쏟을까 손을 덜덜 떨었다는 건 비밀(한입 먹고는 와락 쏟을 걸 그랬다 싶었다) 좀 더 많이 넣으면 더 맛있을 것 같으나 재정적 상황을 고려하자!
공통점
귀신같은 밸런스. 식재료와 다른 양념과의 조화가 환상.
차이점
- 15년 숙성은 상큼함 그리고 혀끝에서 느껴지는 맛이 강하다.
- 20년 숙성은 상큼함이 조금 줄고 달큰함이 더 느껴진다.
- 30년 숙성은 달큰함 그리고 혀뿌리, 목에서 느껴지는 맛이 강하다. 크리미한 질감이 증폭된다.
집에서 즐기는 프랑스 미식 여행
마지막으로 병에 대해서도 한마디 얹는다. 맛이 가장 중요한 건 당연하나, 간지도 빠질 수 없지 않겠나.
15년 숙성 병에는 황금색 바디와 고풍스러운 1830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마치 오래된 유물과 같이 고급스러움과 역사성이 전해진다. 20년 숙성은 블랙 바디에 1830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 또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면서 유럽에서 왔다는 티를 팍팍 낸다.
100mL인 30년 숙성 병은 니치 향수와 같은 패키징으로, 귀하디 귀한 발사믹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두 가지 모두 주방 인테리어의 관점에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 말할 수 있겠다. 특히 30년산 패키징은 하나의 컬렉션으로 소장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패키지에서 고급스러움이 뚝뚝 묻어 나온다.
발사믹 식초 공수기와 체험기를 쓰다보니 이런, 이런, 미식여행까지 해버렸다. 살다보면 이렇게 좋은 날도 있는 법.
Maison Brémond 1830(메종 브레몽 1830) 발사믹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프랑스 장인정신의 집합체다.
이 글을 주로 접하게 될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한다면 나는, “방망이 깎는 노인”이라 평하겠다. 아무리 채근해도 완벽한 방망이가 나오지 않으면 내어주지 않는 장인정신. 예술적인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노력과 정성은 섬세한 맛을 향한 순수한 목적성을 보여준다.
자기만의 맛을 보여주기 위한 자부심과 긍지가 담긴 발사믹, 이제 우리 식탁에서도 함 누려봄직하다.
딴 지 마 켓 검 증 필 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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